박현빈ㅣ제2의 김정우라는 꿈을 담은 그릇
2022. 11. 13. 7:15

신화는 추억이 되고 역사는 다시 시작된다. 2022 카타르월드컵이 성큼 다가왔다. 지나간 월드컵을 아쉬워하는 사이, 새로운 월드컵이 ‘희망’이라는 얼굴로 또다시 기대감을 부추긴다. 4년 주기로 열리는 세계 최고의 축구 축제에 끝맺음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이유다.
월드컵 정상에 서기 위해 지금도 세계 각국은 다음 세대를 찾아내고 길러내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국 축구도 마찬가지다. 한국 축구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개성 넘치는 재능이 다양한 곳에서 반짝이는 시기는 없었다. 20년 전 신화의 시기에 태어난 ‘월드컵 키즈’가 속속 성인 무대에 데뷔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 우리의 현재가 아닌 미래를 주목하는 이유다. 눈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을 넘어 다음 월드컵, 또 다음 월드컵에서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재능을 지닌 다음 세대를 미리 주목해 봤다.
지금부터 소개할 ‘미래의 슈퍼스타’들은 신화의 계절에 태어난 이들이다. 2002년 이후 출생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국내 축구 전문가, 관계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25명을 선정했다. 2022카타르월드컵 개막을 기다리며, 다음 월드컵까지 이어질 희망의 릴레이를 지켜보시길.
스무 번째 주인공은 인천유나이티드의 중앙 미드필더 박현빈이다.
필진: 서호정(축구칼럼니스트), 배진경(전 포포투 편집장), 정재은(네이버 스토리텔러 이재성 편 에디터)
롤 모델을 현실에서 찾거나 마주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인천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 박현빈은 고교 시절 인생의 중요한 전기를 맞았다. 인천 유스인 대건고 축구부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김정우 감독(현 안산 그리너스 코치)의 가르침이 미친 다양한 영향 때문이다.
A매치 71경기에 출전했던 김정우 감독의 현역 시절 중 가장 빛난 순간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다. 기성용과 함께 중원에 배치, 엄청난 활동량, 영리한 수비와 압박, 거기에 공격형 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까지 소화 가능한 공격력까지 발휘하며 남아공월드컵 조별리그와 16강까지 4경기 모두 풀타임을 소화했다.
박현빈 역시 성장 과정에서는 공격적인 미드필더를 많이 봤지만, 김정우 감독을 만나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새로운 포지션적 정체성을 탑재했다. 상대를 피지컬, 파워로 압도할 수 있는 체격 조건을 갖추진 못했지만 그 이상의 축구 지능과 좋은 습관으로 공수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하는 그에게 자신의 곁에 있는 존재 이상의 본보기는 없었다.
스승은 제자와 함께 한 2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이렇게 설명했다.
“현빈이는 처음엔 눈에 띄진 않지만, 보고 있으면 결국 눈에 들어오는 그런 선수였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향상심이 컸고, 가르치면 그것을 확실히 자기 걸로 만들었어요. 점점 클 선수가 될 그릇을 갖고 있는 선수였죠.”
제자는 그런 스승의 가르침이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자신의 미래에 결정적인 자산이 됐다고 했다.
“김정우 감독님을 만나면서 좋은 중앙 미드필더는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히 정리를 하게 됐어요. 감독님이 계속 자신의 노하우를 기반으로 제게 숙제를 주셨고, 그걸 풀어내는 게 성장하는 즐거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태권소년, 축구소년으로의 환승

경기도 광주시에서 성장한 박현빈은 운동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태권도와 축구를 병행하며 운동에 푹 빠졌는데, 처음엔 태권도에 더 관심이 갔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나 이강인처럼 유년 시절 태권도를 배운 것이 축구 선수로 전환하는데 도움이 된 케이스다.
“활동적이고 밖에서 뛰어 노는 걸 좋아하니까 부모님이 여러 운동을 권장하셨어요. 축구는 6살에 광주시에서 하는 취미반에 나가며 시작했죠.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태권도를 병행했어요. 그때까지는 태권도를 워낙 잘했고, 당시 관장님이 계속 하길 권해서 축구는 취미 정도로 생각했어요. 빠릿하고 센스가 좋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검은 띠도 금방 땄고, 겨루기 대회에 나가도 다 이겼어요. 그래서 공 찰 때도 다른 사람 눈에 띄었던 거 같아요. 태권도의 스텝과 발 차기를 이용한 유연성이 축구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지금까지 큰 부상이 없었거든요.”
태권도에서 축구로 확실히 전환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다. 명문 축구부로부터의 스카우트라는 본격적인 관심이 쏟아지며, 박현빈과 부모님은 축구에 올인하기로 했다.
“취미반이었지만 선수를 찾으러 다니시던 초등학교팀 감독님들에게 눈에 띄었던 거 같아요. 4학년 때 하남 천현초등학교 축구부에서 오라는 제의가 와서 거기로 전학을 가며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당시 천현초등학교가 유명한 팀이었고 그래서 선택을 했죠.”
하지만 축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6학년이 되고 진학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며, 축구 선수로 힘차게 나아갈 것 같았던 상황은 속도방지턱을 만났다.
“축구를 그만둘까 고민도 많았어요. 그러다 당시 포천에 골클럽이라는 클럽팀이 생겨 거기로 가서 축구를 배웠습니다. 골클럽은 확고한 축구 철학을 가진 팀이에요. 생각하는 축구를 통해 즐겁게 운동하는 것을 강조한 팀이에요. 그래서 기본기를 중시하고, 상황에 따라 제가 어떻게 헤쳐 나갈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야 했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간절하게 임하면서 공격적인 중앙 미드필더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당시 대건고 감독이었던 전재호 감독(현 베트남 하노이FC 감독)의 눈에 박현빈이 들었다. 전재호 감독은 박현빈이 동계훈련을 마치던 시점에 팀을 떠나며 인연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지만, 대신해서 들어온 것이 김정우 감독이었다. 대건고에 입학해서 박현빈은 열심히 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이어갔다.
“어머니가 중학교 때 하신 말씀이 있어요. 프로 산하 유스에 갈 정도의 실력이 아니면 운동은 그만하고 일반 학생으로 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어떻게든 프로 유스로 가려고 했고, 와서도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했던 거 같아요. 부모님은 열심히 하고, 잘 하라고 최소 기준을 그으신 거죠. 제가 중학교 때 운동을 할 때는 열심히 했는데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걸 좋아해서 PC방도 자주 가고 했거든요. 그런 모습이 부모님 눈에는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는 걸로 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약속을 한 뒤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프로팀 유스는 매 학년마다 일부 선수를 짜르잖아요. 저희 아버지는 1학년 마치면 제가 거기 포함될 거라 생각하셨는지, 입학할 때부터 저 몰래 다른 팀을 알아보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저에 대한 불신은 아니고, 여러 상황에 대비하셨던 거죠. 그런데 대건고에서 매일 최선을 다했고, 졸업을 하고 바로 프로에 진입하게 됐어요. 나중에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제 스스로가 잘해냈다는 뿌듯함이 있었습니다.”
김정우 감독의 심화 학습

김정우 감독과의 만남은 박현빈에게 큰 선물과 같았다. 전재호 감독 역시 측면과 중앙 미드필더를 소화하는 전천후 플레이어였지만, 김정우 감독은 중앙에서 전 포지션을 소화하며 팀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더 익숙했다.
“대건고에 입학 후 첫 동계훈련 중에 김정우 감독님이 오셨어요. 김정우 감독님도 미드필더로서 엄청난 선수였고, 굉장한 재능을 갖고 계셨거든요. 제가 공을 차는 스타일이 감독님 현역 시절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관심을 갖고 많이 봐주셨어요. 훈련이 끝나고도 감독님 현역 시절 스페셜 영상이나 비슷한 유형의 미드필더들 영상을 메시지로 보내주시고, 미드필더들이 어떤 생각과 시야를 갖고 저런 플레이를 하는지 너도 생각해 보라며 일종의 심화 과정을 저한테 던져주셨어요. 그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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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 감독이 준 과제를 착실히 푼 박현빈
“김정우 감독님이 선수 시절 스케일이 큰 축구를 하셨잖아요. 발 앞에 온 공을 차는 것도 잘 하셨지만 엄청 많이 뛰시고, 몸은 말라도 파이터 같은 정신력도 갖고 계셨어요. 많은 활동량과 팀의 위한 헌신이 수비형 미드필더의 기본이니까 그것도 잊지 말라고 하셨어요.”
김정우 감독이 기억하는 박현빈은 어떨까?
“솔직히 처음에는 현빈이가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체격이 왜소했고, 제가 부임한 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체 선수 파악을 해야 하다 보니 우선적으로 눈에 든 선수는 아니었죠. 그러다 3학년과 1, 2학년 간의 연습 경기를 했는데, 현빈이한테 공이 가면 확실히 간수하고 처리하더라고요. 저런 장점이 있는 선수구나 싶었죠. 그 뒤로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열정이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앙 미드필더가 가져가야 할 장점이 어떤 것인지 하나씩 알려줬어요. 처음에는 공을 잡고 상대의 타이트한 압박을 돌아서 나오는 것을 주문했죠. 일주일 만에 제가 원하는 수준으로 올라왔어요. 그 다음에는 시야를 확보해서 좌우로 나가는 패스를 강조했는데 그것도 금방 따라왔어요. 그 다음에 현빈이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요. 감독님 그 다음은 뭘 해야 할까요? 굉장히 영리하고, 더 잘 하고 싶어하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빠르게 흡수를 했던 것 같아요. 프로 1년차에는 쉽지 않았겠지만 제가 아는 현빈이라면 2년차에는 더 좋은 선수가 될 겁니다.”
김정우 감독 체제에서 박현빈은 전국체전 우승을 경험했다. 3학년 때는 코치였던 최재영 감독 체제에서 연속성을 갖고 성장했다. 그리고 꿈에 그렸던 프로 입단이 결정 났다. 임중용 인천 전력강화실장은 “고등학교 내내 저희가 관찰한 선수였고, 팀의 상징성을 지닌 미래의 기둥으로 기대하며 프로 콜업을 한 선수”라고 설명했다. 박현빈도 프로 입단 계약서에 서명을 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작년 9월이 지나서 프로로 가는 게 확정났고, 10월에 부모님과 함께 구단 사무실에 가서 사인을 하고 왔어요. 실감이 안났죠.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며 꿈꿨던 순간이었으니까요. 축구 인생의 두번째 시작점이라 생각했어요. 티비로 봐 오던 대단한 선수들과 공을 찰 수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났어요. 아버지가 직설적인 얘기는 못 하셔서 제 앞에서 티는 안 냈는데 주변 지인 분들한테 자랑을 많이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플래카드 같은 거 아버지가 나가시는 조기 축구회에 걸리나 했는데 그건 안 걸렸더라고요.(웃음)”
꿈에 그리던 데뷔전의 그 날

프로 입단에 성공했지만 새로운 현실은 더 높은 산봉우리 투성이었다는 게 박현빈의 설명이었다.
“무슨 기분이냐면, 산 정상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둘러 보니 더 높은 산들이 꽉 찬 거죠. 형들 실력도 엄청 출중하니까 제가 생각하는 것의 두, 세배를 해야 하니까 힘들었어요. 나이 차도 꽤 나고 처음엔 다가가기 힘들었는데 형들이 막내니까 이뻐하고 도와주신 거 같아요. 축구장 안에서의 여유, 즐기는 법을 가장 많이 배운 거 같아요. 공을 잡았을 때도 많이 배웠지만, 공이 없을 때의 수비적인 대응 부분이 프로에 와서 제 첫 과제였어요. 질문을 많이 하면서 조언을 다 얻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배우는 건 여름이 형요. 저랑 체격조건도 비슷하고, 영리하게 수비하며 좋은 연결을 해주는 부분에서 름이 형 플레이 스타일을 좋아해요. 저의 시선과 입장으로 조언도 많이 해주세요. 그때의 나였다면 이렇게 했을 거 같은데 니 생각은 어때? 라고 얘기 많이 해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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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는 주변이 온통 높은 산 투성이
프로는 주변이 온통 높은 산 투성이
기다렸던 데뷔전은 7월 9일 전북현대와의 원정 경기였다. 조성환 감독은 당시 일주일에 2경기 씩을 치르던 강행군 속에서 전북전을 로테이션의 지점으로 잡았고, 박현빈을 기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프로 첫 시즌 가장 중요한 목표로 데뷔전을 삼았던 박현빈에겐 강한 상대와 맞서야 하는 쉽지 않은 상황이 주어졌다.
“데뷔전을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 경기에서 뛰게 될 지는 몰랐어요. 경기를 이틀 앞두고 비가 와서 실내 운동을 했어요. 저는 운동량을 채워야 하니까 평소처럼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하는데 코치님이 오셔서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경기를 뛰어본 적이 없으니까 ‘무슨 뜻이지? 몸이 무거워 보였나?’ 싶었죠. 하루 일정이 끝날 때 다음날 스케줄이 나오는데 그런데 제 이름이 원정을 가는 명단에 있더라고요. 지금도 그걸 캡쳐해서 저장해 놨어요. 경기 전날은 명단 든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으로 나눠서 훈련하는데 경기 준비를 위한 팀에 갔을 때 형들이 축하를 해줬어요.”
“그때까지도 사실 선발 출전을 할 지는 예상 못했죠. 저녁 경기니까 오전에 가볍게 산책을 하는데 감독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특유의 경상도 그 사투리로 “오늘 선발인데 현빈이 우짜면 좋나?”라며 웃으시는 거예요. 긴장을 덜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저한테 먼저 알리신 거 같아요. 그래서 “좋습니다. 자신 있어요”라고 답했어요. 2시간 뒤에 전체 미팅을 했는데 선발라인업에 제 이름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전에 말한 것과 달리 손발에 땀이 나더라고요. 형들은 잘할 수 있다며 축하와 응원을 해주시는데 호텔에서 출발하려고 버스를 탔는데 그때도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이동수와 함께 중원에 선 박현빈은 데뷔전에서 44분을 소화하고 이명주와 교체되며 나왔다. 그가 뛰는 동안 인천은 2실점을 했고, 후반에 에르난데스의 활약을 통해 김보섭, 김성민이 골을 넣어 경기는 2대2로 끝났다. 박현빈에게 데뷔전에 대한 복기를 부탁해봤다.
“몸 풀 때까지는 긴장이 남아 있었는데, 경기에 들어가기 전 터널에 서 있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잘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라운드 위에서는 그게 사라지더라고요. 제가 2실점을 했지만 실점 전까지는 제가 잘 하는 플레이들이 몇 차례 나왔어요. 아쉬운 건 결국 실점이죠. 제가 있는 동안 2골을 허용했기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로서의 책임이 컸다고 보고요. 그 점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때로 돌아가 한 장면을 바꾼다면, 첫 실점 장면에서의 선택을 바꾸고 싶어요. 측면에서 (김)성민이 형이 공을 잡았어요. 제가 중앙을 지켜야 했는데 앞에 공간으로 뛰어 나갔거든요. 그런데 성민이 형이 김진수 선수 압박에 끊겼고, 그대로 김진수 선수가 몰고 와서 슈팅을 날려 실점까지 했어요. 그 장면에서는 중앙을 지키면서 더 안정적으로 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중앙 쪽에 제가 위치했다면 우리 수비도 뒤쪽에서 시간을 갖고 좀 더 잘 대응했을 거 같거든요.”
“정신이 없었던 데뷔전이었어요. 경기 후 GPS 데이터를 봤는데 전반전 기록치고는 뛴 거리가 많더라고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봤어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많이 뛰었구나라는 결론이었죠. 좋게 말하면 열정이지만, 그만큼 정신 못 차리고 경기 했다는 반성을 했어요. 생각을 했던 것이 막상 되지 않았던 경기였고요.”
아무리 뛰어난 유망주라도 프로에 진입해서는 필연적으로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것은 경험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된다. 박현빈 역시 고등학교 시절이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훈련이나 연습 경기에서 보였다. 프로의 속도와 노련한 대응 앞에 아직은 부족함이 드러난 프로 1년차였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의기소침해 질 때가 있었다. 그러면 큰 힘이 된 것은 팀 내의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은 박현빈에게 “실수는 당연하다. 그걸 통해 고쳐 나가고 발전하는 거다. 그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쌓아 나갈지를 생각하라”는 조언을 해줬다.
“프로는 경기장 안에서 여유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1대1 수비 능력에서 절대 돌파를 허용하면 안 되고요. 축구는 단체 스포츠니까 팀 적응력이 중요해서 서로를 잘 알아야 하는 거 같아요. 제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롱볼이나 스루 패스도 많이 하려고 했어요. 당연히 성공보다는 실패하는 횟수가 많지만 잘 들어갔을 때는 한 번에 상대를 무너트릴 수 있으니까 그걸 장점으로 가져가고 성공 확률을 높이려고 합니다.”
부스카, 동료를 찾는 시야

지난 3월 박현빈은 20세 이하 대표팀에 가며 연령별 대표팀에도 처음 승선했다. 프로에서의 쓴 경험은 연령별 대표팀에서의 경쟁력으로 치환됐다. 훈련에서 늘 수준 높은 선수를 상대하다 보니 또래들과 할 때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