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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I C H A E L . J O R D A N

M I C H A E L . J O R D A N

​팀 스 토 리

MJ-2. 실패는 항상 나를 더욱 노력하게 만든다

FAILURE ALWAYS MADE ME TRY HARDER THAN NEXT TIME
-I CAN'T ACCEPT NOT TRYING ON MICHAEL JORDAN


 

“코치님, 저는 당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어요.”

2009년 9월 11일, 미국 메사추세스주 스프링필드에서 열린 2009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마이클 조던이 남긴 한마디. 당시 조던이 남긴 명예의 전당 입성 소감은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보다는, 평생을 승부사로 살아온 자신의 경쟁의식과 폄하로 인식돼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 글은 마이클 조던이 언급한 ‘코치의 실수’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그 실수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승부사 마이클 조던과, 그가 이뤄낸 수많은 명장면들을 만나볼 수 없었을 것이며, 미국 프로농구(NBA) 역시 지금의 위상을 차지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조던의 농구 인생은 도전과 경쟁, 증명의 연속이었다. 큰 벽에 맞서 이를 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과연 될까?’라는 세간의 의문을 일축시키는데 성공해왔다. 그렇다면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맞았던 첫 난관은 무엇이었을까?

첫 좌절

시간은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혀를 길게 내밀고 상대편 위로 덩크를 꽂던 23번도, 농구 좀 한다는 학생들이면 누구나 한번쯤 신었을 에어조던 시리즈도 없던 그 시절, 마이클이 레이니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일 때의 일이다.

주(州) 토너먼트 대회에 나갈 학교 대표팀이 발표되던 날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라커룸 알림판으로 향한 조던은 대표팀 명단을 훑어봤다. A…B…C…D… 알파벳 순서대로 정렬된 명단에 ‘J’는 없었다.

탈락.

조던이 태어나서 맛본 첫 좌절이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키는 작았지만, 평소 열심히 준비했기에 내심 기회가 오리라 기대했던 터였다. 조던을 더 화나게 한 건 동고동락해온 친구, 리로이 스미스(Leroy Smith)가 선발됐다는 사실이었다. 좌절감과 질투심에 마이클은 한동안 연습에 나가지 않았다. 코치와도 말하지 않았다. 한 인터뷰에서는 “집에 가자마자 통곡을 했다” 고도 말했다.

이 사건이 그에겐 큰 자극이 됐다. 스스로 ‘실패’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됐던 것이다. 코칭스태프에게 그 선택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훗날 그가 유명해진 뒤, 이 일은 더 화제가 되어 부모님들이 실패한 아이를 위로할 때 가장 자주 쓰이는 일화가 됐다. “마이클 조던도 팀에서 탈락한 시절이 있었어”라고 말이다. 기자들도 당시 조던을 탈락시킨 코치에게 묻곤 했다.

“왜 그때 마이클을 탈락시키셨습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팀에 키 큰 선수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했으니까요. 조던이 (탈락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란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땐 그가 얼마나 좋은 모습을 보여줄지 모르는 시점이었습니다.”

조던을 지도했던 프레드 린치(Fred Lynch) 코치의 말이다. (사실, 조던을 탈락시킨 장본인은 팀을 총괄하고 있던 클리프튼 허링이었는데, 그는 조던이 유명해진 뒤 이 질문을 하도 많이 들어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리로이 스미스는 198cm(6피트 6인치)로 고등학생치고는 꽤 키가 컸던 반면, 조던은 180cm(5피트 10인치)도 되지 않는 작은 선수였다. 여러 스카우팅 리포트와 캠프 관계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봤을 때 조던이 두각을 나타냈던 부분은 민첩함과 개인기였다. 하지만 코칭스태프는 토너먼트와 같은 단기전에서는 가드가 한 명 더 있는 것보다는, 신장이 더 큰 선수를 데려가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이미 팀에 가드가 8명이나 더 있었다.

결국 조던은 그 대회에서 대표선수들의 가방이나 들어주는 신세가 됐다. 아마 이때도 그는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꼭 최고의 선수가 되겠어”라고 다짐하며 말이다.

조던은 프로선수가 된 뒤에도 그 시절을 잊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동기부여에 활용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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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의 경쟁 의식은 때때로 동료들조차 지치게 만들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것에서 동기부여를 얻고, 이를 발전의 ‘계기’로 활용하곤 했는데, 고교 시절의 좌절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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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질 때면 전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리곤 하죠. 대표선수 명단에 제 이름이 없었던 걸 확인하던 그때를요. 그러면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죠.”

올랜도 매직의 부사장(Vice President) 팻 윌리엄스(Pat Williams)는 이 일화를 통해 마이클 조던의 집념과 야망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저서 「마이클 조던처럼 되기(How to be like Mike)」에서는 “빌 러셀(Bill Russell)도 고등학교 3학년 때 2진으로 내려간 경험이 있었다. 조던과 러셀 모두 최초의 좌절로 인해 맹렬한 야망을 갖게 됐다”라고 서술했다.

대표팀 탈락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 조던은 타고난 농구 천재는 아니었다. 소질은 있었지만, 농구를 하기에는 키가 너무 작았던 아이였다. 조던은 1963년 2월 17일, 아버지 고(故) 제임스, 어머니 들로리스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에 대한 지인 및 기자들의 평가에서 한결 같이 빠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근면함’과 ‘겸손함’이었다.

이들 부부는 조던이 5살이 되던 1968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Wilmington)으로 이주했는데, 조던의 대성공 덕분에 누린 ‘부(富)’를 논하지 않아도 충분히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모은 자수성가(自手成家)형 가정이었다. 퇴역공군이었던 제임스 조던은 전기기기 제조업체였던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에서 수리공으로 입사해 부장까지 승진했고, 들로리스는 유나이티드 캐롤라이나은행(United Carolina Bank)에 금전 출납계 직원으로 입사해 고객상담 책임자까지 승진한 뒤 은퇴했다. 부모님의 영향 덕분에 교육에 있어 자녀들은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고, 외부적인 차별도 크게 겪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러한 부모님과는 달리, 10대 중반까지 조던의 이미지는 말썽꾸러기였다. 형들과 누나가 일찌감치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보태는 등 성실했던 반면(심지어 여동생도 고등학교를 3년 만에 마치고 오빠와 같은 해에 대학에 입학했다), 조던은 공부는 멀리한 채 노는 데만 집중했다. 새 학기 첫 날 수업 도중에 땡땡이를 쳤다가 3일 근신 처분을 받는 등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가기 일쑤였다.

너무 게을렀던 나머지, 아버지가 “저 녀석은 차라리 운동선수가 된 게 다행이라 느껴질 정도”라고 놀리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공장 같은 곳에 취업했다면 굶어죽었을 지도 모른다”라고 거든다. 어머니는 조던이 시킨 일을 하지 않으면 용돈을 안 주곤 했는데, 그래서 조던은 늘 무일푼이었다는 형제들의 증언도 있다. 그래도 조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농구공이든 야구공이든, 던질 수 있는 것만 있으면 만족했다는 후문이다.

운동에 있어 조던은 야구나 미식축구 등 구기 종목에서 소질을 보였다. 처음 재미를 느낀 운동은 야구였다. 로베르토 클라멘테(Roberto Clemente)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 덕분이었다. 투수였던 마이클은 여러 차례 완봉승을 따내며 1975년 남부소년야구연맹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윌밍턴 리틀리그 MVP가 됐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도 학교 야구 선수를 병행했었고, 그를 야구특기자로 스카우트하려는 대학교도 있었을 정도였다.

미식축구에서는 쿼터백을 맡았다.

저명한 농구해설자이자, 시카고 불스와 워싱턴 위저즈에서 마이클과 호흡을 맞췄던 덕 콜린스(Doug Collins) 감독은 “처음 봤을 때부터 조던은 몸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그는 풋볼 선수의 몸(football body)을 갖고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그가 가장 싫어했던 운동은 수영이었다. 7살 때 친구와 근처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봉변을 당할 뻔했다. 그 뒤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물가에는 잘 가지 않았다고,

그 중 조던이 열정을 가장 불태웠던 종목은 바로 농구였다. 12살 때 어머니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들이 키가 자라는 마음에서, 혹은 협동심을 길러주기 위해 농구나 축구 등의 과외활동을 고려하지만 들로리스가 마이클 손에 농구공을 쥐어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야구 리그가 쉬는 동안 조던이 밖에서 행여 말썽을 피우진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을 동네에서 운영하던 유소년 농구교실에 보냈던 것이다.

조던은 농구도 곧잘 했다. 학교 대표팀 탈락 사건 외에도 조던으로 하여금 더 열심히 하고, 실력을 향상시킨 계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형, 래리와의 1대1 대결이었다. 조던보다 5살 많았던 래리 조던은 어린 시절에 ‘넘지 못할 벽’처럼 여겨졌다. 키는 175cm(5피트 8인치) 정도로 작았지만, 탄력이 어마어마해 높은 난이도의 슬램덩크도 곧잘 성공시켰다. 래리의 덩크슛 장면은 훗날 CBS의 시카고 불스 경기 중계방송 중에도 소개되기도 했다.

둘은 늘 집 뒷마당에 설치된 간이 코트에서 1대1을 하곤 했는데, 승자는 늘 래리 조던이었다. 동생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형은 늘 나를 압도했어요. 나보다 나이도 많았고, 키도 컸으니까 당연히 실력도 좋았죠. 형은 항상 날 이긴 다음에 이런저런 말을 해줬는데,  그 말이 며칠 동안 잊히지 않더군요. 그래서 더 열심히 운동을 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의 경쟁들이 내게는 더 소중한 경험이 됐던 것 같아요. 더 게임을 사랑하고, 노력하게 해줬으니까요.”

키가 작아 늘 형에게 지고, 심지어는 대표팀에서도 탈락해야 했던 마이클 조던. 그랬던 그에게 하늘에서 큰 선물이 내려온다. 조금씩 키가 자라더니 3학년 때는 190cm를 넘기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마치 키가 커지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쑥쑥 자랐다”고 말했을 정도. 이는 조던 일가의 큰 사건이었다. 가족 중 190cm가 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키가 자란 조던의 자신감은 두 배가 됐다. 시야도 넓어졌고, 점프력은 더 좋아져 득점도 수월해졌다. 고교시절 감독 클리프튼 허링은 “내 기억에 2학년 때는 연습 중에 딱 한 번 덩크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3~4학년 때는 경기 중에도 쉽게 덩크를 성공시켰다. 점프슛을 던질 때는 너무 높이 뛰어 마치 앞에 수비자가 없는 것 같았다” 라고 회고했다.

조던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실력 발휘를 시작했다. 넘지 못할 것만 같았던 형을 꺾었고, 3학년이 되면서 팀에서도 당당히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부터 조던은 농구에만 집중했다. 풋볼을 포기하고, 그 시간을 농구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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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제임스 조던은 마이클 조던이 농구와 학업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데 큰 힘이 된 인물이다. 사진은 1988년 NBA 올스타전 MVP 수상 직후 ⓒ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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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세를 떨치다. 

조던에게서 아버지 성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 농구에 관한 한 조던에게서 결코 ‘게으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후 5시 30분부터 팀훈련을 소화한 뒤에도 체육관에 남아 밤 9시까지 개인훈련에 임했다. 아침에도 수업 전에 체육관으로 향했다. ESPN은 “레이니 고등학교에서 제일 일찍 출근했던 사람이 바로 마이클 조던이었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조던에게는 연습이 곧 실전이었다. 농구팬이라면 한번쯤 시카고 불스에서 그가 보여줬던 지독한 승부 근성에 관한 일화를 듣고선 혀를 내둘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조던은 고교시절에도 동료들이 자신처럼 죽기살기로 훈련에 임하길 원했다. 그 근성을 높이 산 허링 감독은 조던을 스타로 키우기로 결심했다.

조던이 23번 등번호를 갖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허링 감독은 조던을 불러 졸업한 선배의 등번호 2개를 내밀었다. 23번과 33번이었다. 23번은 학교 대표팀 주전 포인트가드제임스 비티(James Beatty)가 쓰던 것이었고, 33번은 슈팅가드 데이브 맥기(Dave McGhee)가 쓰던 것이었는데, 이때 조던이선택한 등번호는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등번호가 됐다.

조던도 누군가의 ‘Next’ 버전이던 시절이 있었다. (출처=스포팅뉴스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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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때 조던은 라이벌 뉴 하노버 고교를 맞아 마지막 15점을 혼자 득점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경기는 하나의 도화선과도 같았다. 우연히 그 경기를 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출신 동문이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코칭스태프에게 전화를 걸어 “기가 막힌 녀석이 있다”고 제보(?)를 한 것이다. 연락을 받은 딘 스미스 감독은 당시 코치였던 빌 거스리지(Bill Guthridge)를 시켜 “마이클 조던이 어떤 선수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포츠 저널리스트 빌 거트먼은 저서「MICHAEL JORDAN」에서 당시 마이클 조던을 스카우트했던 거스리지 코치의 평가를 인용했다.

“첫 인상은 OK였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조던은 GOOD이었지, GREAT는 아니었다. ACC(애틀랜틱 코스트 컨퍼런스)에서 뛸 재능은 충분했지만, 노스캐롤라이나 기준에서라면 매우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조던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팀을 13승 10패로 이끌면서 지역 최고 선수만 선발하는 올-컨퍼런스 팀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그때까지도 조던은 자신이 디비전 II 정도의 대학에 진학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레이니 고등학교 출신 중 디비전 I 대학에 진학한 운동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마이클 조던이 학교 역사를 바꿔놓은 셈이다.

 

4학년이자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80-1981시즌, 마침내 그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기량의 소유자가 됐다. 방학동안 허링 감독은 조던에게 드리블과 패스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마하도록 지시했다. 이중삼중으로 에워쌀 상대의 집중 견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그는 평균 32분을 뛰면서 27.8득점 12.0리바운드를 올렸다. 45득점, 47득점씩을 올린 날도 있었고, 팀은 19승 4패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하진 못했지만 조던이 얼마나 가능성 있는 재목인지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당시 시즌 MVP 타이틀은 라이벌 뉴하노버 고교의 케니 게티슨이 가져갔다. 케니 게티슨도 1986년에 NBA에 진출했지만, 프로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마이클의 이러한 급성장 뒤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부단한 연습. 지독한 연습벌레였지만, 서두르진 않았다. 코치의 지도에 따라 하나하나, 차근차근 단점을 개선하고 기술을 습득했다. 집중력도 엄청났다. 아버지의 영향 덕분이다. 학교에서 활약 덕분에 조던의 주변에는 늘 친구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우쭐해하지 않고 연습에 매진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코치들이 ‘언젠가는 NBA에도 갈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해줘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쁜 것은 철저히 멀리했다. 어떤 코치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였던 것이다. 갑작스런 신체적 성장과 노력, 그리고 농구를 대하는 그의 진지한 자세는 최상의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 효과가 바로 또 다른 요인을 만들어냈다. 바로 자신감이다.

사실, 조던은 4학년이 되기 전까지 전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가 없었다. 어떤 스타일의 선수인지조차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대개 명문대학의 스카우트 대상자들은 고교 졸업이전에 최소 1~2번 이상 전국적인 농구캠프에 초청을 받는다. 오늘날 나이키 후프 서미트(Hoop Summit)나 아디다스 캠프(adidas Camp) 같은 캠프에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유망주들이 모두 모인다. 맥도널드 올-어메리칸(All-American)에 선발된 선수, 명문 컨퍼런스의 명문대학 진학이 예정된 선수, 아직은 어리지만 특급 대우를 받을 선수 등… 그 나이 또래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선수들만 ‘가문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당연히 캠프 주변은 명문대 감독 및 코치, 기자, 에이전트 등으로 북적인다. 그러나 조던에게는 이러한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가 학교를 대표해 뛴 건 겨우 한 시즌 남짓했기 때문이다.

조던이 참가한 캠프는 겨우 2개. 첫 번째는 딘 스미스가 개최한 농구캠프였고, 두 번째는 피츠버그에서 열린 ‘파이브-스타 캠프(Five-Star Camp)’였다. 하지만 이 단 2번의 캠프만으로도 그는 마이클 조던이 어떤 선수인지 소문을 퍼트리는데 성공했고, 동시에 자신감도 끌어올렸다.

조던은 아마도 이 2번의 캠프를 치르면서 묘한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무명의 선수가 단 2주 만에 명문대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고, 동년배 선수들 사이에서도 우상으로 떠올랐으니 말이다.

먼저, 딘 스미스 캠프부터 이야기해보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명장, 딘 스미스 전(前) 감독이 운영하는 농구캠프 역시 아무나 올 수 있는 무대는 아니었다. 조던은 리로이 스미스와 함께 캠프에 참가했는데, 단 며칠 만에 로이 윌리엄스 코치, 빌 거스리지 코치는 조던의 팬이 됐다.

더그 모(Doug Moe) 코치도 그 중 하나였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동문이었던 더그 모는 당시 NBA 덴버 너게츠 팀의 어시스턴트 코치였다. 더그 모는 팀 감독이던 도니 월시(Donnie Walsh)의 지시로 제임스 워디(James Worthy)의 기량을 점검하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에 출장을 왔다가 조던의 팬이 되어버렸다. 그는 도니 월시에게 마이클 조던 예찬론을 펼쳤다고 한다.

“워디는 어떻던가?”

 

“감독님, 워디는 잊으세요. 그보다 더 대단한 녀석이 있습니다.”

 

“누군데?”

 

“마이클 조던이라 하더군요.”

“잘하던가?”

 

“감독님, 그냥 잘 하는 게 아니라 너무 훌륭해요. 제리 웨스트(Jerry West), 오스카 로버트슨(Oscar Robertson)급입니다.”

 

조던의 기량은 심지어 선수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퍼졌다. “어떤 높이, 어느 위치에서든 패스를 띄워줘도 곧장 앨리웁 덩크로 연결시키더라”, “인사이드에서의 개인기가 기가 막힌 선수더라” 등이다. 뿐만 아니라 기량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개인플레이 대신 감독의 지시사항대로 경기를 풀어가고, 하루 일과가 끝난 뒤에도 묵묵히 개인연습을 하는 모습에 코치들은 반할 수밖에 없었다. 딘 스미스 감독이 조던의 스카우트를 결심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 무렵, 허링 감독은 제자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워드 가핑클(Howard Garfinkel)이 주최하는 파이브-스타 캠프에도 조던을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조던은 이때까지도 무명에 가까웠지만, 로이 윌리엄스 코치의 추천서 덕분에 그 해 7월, 전국의 유망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조던은 펄펄 날았다. 적수가 없었다.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다. 캠프에서 챙긴 트로피는 10개였고, 경기 MVP상은 2번이나 받았다.

덕분에 캠프가 끝날 무렵의 조던은 더 이상 ‘무명’이 아니었다. 다른 선수를 보러온 지도자조차도 조던에게 홀딱 반했다는 후문이다. 조던도 “처음 캠프가 시작할 때는 아무도 나를 몰라봤지만, 결국 나는 그 캠프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년 간 아마농구 무대를 취재해온 데이브 크리더(Dave Krider) 기자의 2004년 잡지 기고문을 보면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있다.

“나는 매년 봄마다 각 주(州)의 정보원들로부터 그 주 최고의 유망주 20명에 대한 정보를 받아왔는데, 1980-1981시즌 노스캐롤라이나 주 리스트에는 조던의 이름이 없었다. 그런데 7월 중순 무렵, 파이브-스타 캠프를 운영하던 하워드 가핑클이 내게 전화를 걸어 무척이나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캠프 MVP를 수상한 조던이 전국 최고의 선수로 올라설 것이라며 말이다. 그는 내게 반드시 조던의 이름을 잡지에 넣어야 할 것이라 말했지만, 이미 페이지 편집이 끝나서 내용을 수정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우리 편집장 역시 조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당시 가핑클은 조던의 경기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내 말을 믿게나, 그 녀석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갖고 있어. 만약 올-어메리칸 후보 섹션에 마이클 조던의 이름이 없다면, 자네는 두고두고 놀림 받을걸세.”

“이미 편집하기에는 늦었어.”

“너희 편집장에게 어서 말해! 재작업을 하는데 100달러가 들더라도 꼭 마이클의 이름을 넣어야 한다고!”

하지만 「Street & Smith」가 발행한 전국 유망주 리스트에 조던의 이름은 끝내 오르지 못했다. 크리더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정보원을 교체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조던은 이런 상황들을 즐겼던 것 같다. 이 무렵에 만나 팀 동료서 오랜 친구사이가 된 버즈 패터슨(Buzz Peterson)은 “조던은 다른 캠프에 초청 받지 못한 것을 개인적인 자극제로 사용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조던이 나이키와의 계약 당시 고교시절 자신을 캠프에 초청해주지 않은 관계자를 일부러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는 일화도 있다. 그 관계자의 이름은 소니 바카로(Sonny Vaccaro). 고교 유망주, 에이전트, 대학 관계자들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캠프 전문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마이클 조던을 나이키에 추천한 인물도 소니 바카로였다.)

조던의 이러한 경쟁 심리에 대한 일화를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자. 1981년 맥도널드 올-어메리칸 게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맥도널드 올-어메리칸 게임은 ‘고교농구 올스타전’과 다름없는 대형 이벤트다. 조던은 이 경기에서 종료 11초를 남기고 중요한 자유투를 모두 성공시키며 승리(96-95)를 이끌었다. 19개의 슈팅을 시도해 13개를 넣으며 30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MVP는 엉뚱하게도 에드리언 브랜치(Adrian Branch)와 어브리 쉐로드(Aubrey Shorrod)에게 돌아갔다. 모두가 의아해 했던 결과였다.

이때의 굴욕을 기억했던 것일까? 조던은 3년 뒤 브랜치가 몸담고 있던 메릴랜드 대학과의 경기에서 브랜치에게 굴욕을 선사했다. 시원하게 경기를 이겨버린 뒤 종료 버저와 동시에 슬램덩크를 꽂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승패가 확정된 상황에서 앞서고 있는 팀이 무리하게 득점을 노리는 것은 매너에 어긋난 행동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딘 스미스 감독은 매너를 중요시했던 감독이었다. 점수가 앞서고 있을 때 화려한 플레이를 하는 것은 상대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조던은 마치 보란 듯 화려한 덩크를 성공시켰고, 이 때문에 워싱턴 포스트 (Washington Post)를 비롯한 몇몇 기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 했다. 조던이 이러한 행동을 한 이유는 바로 브랜치 때문이었다. 브랜치에 대한 경쟁심을 3년여가 지난 시점까지도 가슴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경쟁심에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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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스미스로부터 강한 영감을 받은 마이클 조던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거쳐 시카고 불스에 입단하게 된다. (사진출처=나이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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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선택한 사연

다시 4학년으로 진급하던 시점으로 돌아가자.